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촉 명씨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明]](밝을 명). 본관은 서촉(西蜀) 단본이며 이외에도 연안(延安), 해주(海州), 황해(黃海), 한양(漢陽), 양산(陽山), 태안(泰安) 등 24본까지 있다고 하나 모두가 한 핏줄의 세거지명에 불과하다. 시조 [[명옥진]](明玉珍)은 원 말의 군웅으로 촉(蜀), 오늘날 [[사천성]] 일대에 [[명하]]를 세웠으나 1366년(고려 공민왕 16) 사망해 아들 명승(明昇)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위를 계승했지만 1371년(공민왕 20) [[명나라|명(明)나라]] [[홍무제|태조 주원장]]의 세력에 항복하였다. 주원장이 명승(明昇)을 귀의후(歸義侯)에 봉하고 명나라에서 살도록 했으나 명하의 잔존 세력들이 계속 저항하자 이듬해 명승과 어머니 팽씨(彭氏)[* 비록 단명한 왕조이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중국의 [[황태후]]였기에 조선 건국 당시 각종 궁중 법도를 정할 때 자문역으로 참여했다고 한다.] 등 일족 27명이 함께 고려로 보내졌다. 고려에 귀화하자 같은 해 6월에 [[공민왕]]은 이들에게 저포(苧布) 9필을 하사하였다. 공민왕은 명승과 모후 팽씨를 [[개경]] 흥국사(興國寺)에 살게 하고, 연안, 백천 양현(兩懸)의 공물(供物)로 공봉(供奉)하였다. 명승은 총랑(摠郎) 윤희종(尹熙宗)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아들 4형제를 낳아 우리나라 명씨(明氏)와, 창평 [[승(성씨)#s-3|승(昇)]]씨의 시원을 이루었다. 그래서 서촉 명씨와 창평 승(昇)씨는 서로 통혼하지 않는다고 한다. 인구는 2015년 기준 29,110명이다. 인구대비 비율 0.057%, [[한국]] 국민들 10000명 중 6명만이 명씨인 셈이므로 쉽게 발견하기는 힘든 성씨이다. 임진왜란 때 개경에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. 중국 [[충칭|중경]]시 강북(江北)구에 명옥진의 황릉이 있다. 한편 명씨는 외래 귀화 성씨임에도, 중국에서는 명([ruby(明,ruby=Míng)]; 밍)씨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. 명옥진이 [[명하]](明夏)의 초대 황제이자 명(明)씨의 시조로서, 그 아들 명승(明昇)과 일족이 [[고려]]로 왔기 때문이다. 명옥진은 원래 민(旻)씨였으나 명(明)씨로 바꾸었고, 이는 [[명나라]] 태조 [[주원장]]이 국호를 '대명(大明)'으로 정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. 당시 한족들이 [[원나라]]에 대항하면서 [[백련교]] 일명 '명교(明敎)'를 숭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. 그나마 혹시 중국에 남아있었을지도 모를 명씨들은 [[장헌충]]의 전설적 학살 등으로 사라졌을 것이다. 명씨 대종회 카페가 있다. [[https://cafe.naver.com/myungtaewon|네이버 카페]], [[http://cafe.daum.net/myungc/9iYa|다음 카페]] 명씨 대종회로서 중국과 교류하기도, 명씨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한다. 2013년 6월 13일, 네이버 밴드에도 명씨대종회(明氏大宗會)를 개설했다. 2018년 5월 5일, 대전광역시 뿌리공원에 [[https://djjunggu.go.kr/html/hyo/bburi/bburi_030201_2.html?num=250|명씨 비석]]이 세워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